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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 Symphony No.2 in Bb major D.125

Berliner Philharmoniker / Karl Böhm

 

 

Mov.I: Largo - Allegro vivace 00:00
Mov.II: Andante 14:07
Mov.III: Menuetto: Allegro vivace 22:20
Mov.IV: Presto vivace 25:32

 

 

 


 

 

 

 

 

 

Karl Böhm(1894~1981)

 

 

우리나라의 갑오개혁 때 태어나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발사되던 해 우리 곁을 떠난 지휘자가 있다. 그의 지휘 레코딩은 78회전 SP로부터 스테레오 녹음에까지 이른다. 지휘자 카를 아우구스트 레오폴트 뵘은 1894년 8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뵘의 부친은 에거란트(독일과 체코의 국경지역) 지역 출신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보헤미안이었고, 모친은 알자스 지방 출신이었다. 뵘은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해 그라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런데 그라츠 슈타츠오퍼의 법률 고문을 맡고 있었던 뵘의 아버지 주변에는 음악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중 한 명이 뵘을 브람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만디체프스키에게 소개해 줬고, 뵘은 빈 음악원 (지금의 빈 국립 음대)에서 만디체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1917년 그라츠 슈타츠오퍼에서 데뷔한 뵘은 상임지휘자 자리를 약속받는다. 당시 바그너의 친구였던 카를 무크는 뵘이 지휘한 바그너 [로엔그린]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당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 브루노 발터에게 뵘을 소개했다. 발터는 1921년 뵘을 초청해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지휘대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뵘은 발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와 주고받은 모차르트에 대한 견해는 뵘을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어 주었다. 1922년부터는 발터의 후임으로 한스 크나퍼츠부쉬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크나퍼츠부쉬 역시 모차르트 레퍼토리는 거의 모두 뵘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이후 젊은 뵘의 지휘 포스트는 다름슈타트로 옮겨졌다. 다름슈타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뵘은 이때 총감독이었던 루돌프 빙과 만난다. 훗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이 되는 빙과 뵘의 우정은 이때부터 평생동안 계속됐다.

 

 

1931년부터는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으로 지휘 활동을 전개한 뵘은 1934년에는 프리츠 부쉬의 뒤를 이어 드레스덴 젬퍼 오퍼의 총감독에 취임했다. 이 시절 그는 현대 오페라를 선보이는 데 힘썼다. 특히 알반 베르크[보체크]를 지휘해 찬사를 받았으며 작곡가 베르크와도 친밀함을 유지하며 베르크 작품을 전세계로 널리 알렸다. 부르크 시절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가까이 지냈던 뵘은 드레스덴 시절 작곡가의 [말없는 여인]을 초연했고 1938년 작곡가가 뵘에게 헌정한 [다프네] 역시 세계 초연했다. 1944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80세 생일을 기념해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지휘하기도 했다.

 

뵘은 빈 슈타츠오퍼의 수석지휘자 역할을 수행하다가 1943년에는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그는 빈에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를 비롯한 재능있는 가수들을 차례로 발견해 전설적인 ‘뵘 패밀리’를 만들어냈다. 또한 1945년 당시 독일에 합병됐던 오스트리아에서 프란츠 샬크를 이어 ‘오스트리아 음악총감독’의 칭호를 받았다. 독일-오스트리아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나치 협력과 관련해 연합군으로부터 2년동안 연주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지만 1947년에 복귀하게 된다. 그 이후 뵘의 커리어는 발전일로였다.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으며 빈 필하모닉,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다. 또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도 오랜만에 재회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1954년 두번째로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에 취임한 뵘은 1955년 11월 연합군의 폭격에 불타버린 빈 슈타츠오퍼 극장 재건 기념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지휘했다. 이어서 모차르트 [돈 조반니], 베르크 [보체크], R. 슈트라우스 [그림자 없는 여인]을 지휘했다. [돈 조반니]는 원래 브루노 발터에게 지휘를 요청했었지만 고령으로 쇠약해진 발터가 뵘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직을 사임한 후 뵘은 특정 오케스트라에 머물지 않고 프리랜서 지휘자로 객원 지휘와 녹음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57년 뵘은 [돈 조반니]를 지휘하면서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데뷔했다. 그는 루돌프 빙이 메트 총감독으로 있던 시기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뵘은 메트 무대에서 262번이나 지휘했는데 그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와 [그림자 없는 여인](새 공연장 링컨 센터에서의 첫 번째 성공작)의 초연을 비롯하여 베토벤 200주년을 기리기 위한 [피델리오], [피가로의 결혼], [트리스탄과 이졸데](1959년 비르기트 닐손 메트 데뷔 콘서트), [파르지팔], [로엔그린], [오텔로], [장미의 기사], [살로메], [보체크], [엘렉트라] 등이 있다.

 

196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첫 등장한 뵘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예술감독 빌란트 바그너와 함께 새로운 바이로이트 양식을 창조했다. 1966년과 1967년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뵘의 실황은 [니벨룽의 반지] 음반(Philips)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DG)으로 만들어져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1964년 제2차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음악총감독의 영예를 받았으며, 1967년에는 빈 필 창립 125 주년을 맞아 설립된 ‘명예 지휘자’ 칭호를 수여 받았다.

 

카를 뵘(왼쪽)과 뉴욕필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가운데)의 만남

 

1973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젊은 지휘자에게 수여하는 ‘카를 뵘 상’을 제정했다.이밖에도 뵘은 함부르크 필 명예지휘자, 런던 심포니 계관지휘자, 빈, 그라츠, 잘츠부르크 시의 명예시민이었고, 독일연방공로십자훈장, 바이로이트 황금명예반지를 수상했다. 또 그에게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명예회원, 다름슈타트 슈타츠오퍼 명예회원, 베를린 도이치 오퍼 명예회원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만년의 뵘은 197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참가를 시작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의 펠젠라이트슐레 옆의 음악홀 이름은 그를 기려 ‘카를 뵘 잘’로 명명되었다. 그는 1981년 8월 14일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런던 심포니 회장(President)직을 유지했다.

 

뵘의 사망 소식은 전세계 음악계에 충격이었다. 카라얀은 연주회에서 연주에 앞서 추도의 말을 전했고 모차르트 [프리메이슨을 위한 장송 음악]을 연주했다. 제임스 레바인은 모차르트 [레퀴엠]을, 아바도는 [마태수난곡]을 연주해 뵘의 가는 길에 바쳤다. 베를린 필은 뵘이 지휘할 예정이었던 연주회에서 대타 지휘자를 세우지 않고 지휘자 없이 콘서트를 거행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이겐 요훔, 게오르그 솔티 등도 추모 음악회를 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뵘을 위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의 무덤이 있는 빈 중앙묘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유족들의 희망에 따라 그라츠의 슈타인펠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뵘은 초창기 나치에 동조한 혐의를 받기는 했지만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에 의하면 1923년 뵘은 뮌헨 오페라 극장에서 리허설을 멈추고히틀러의 뮌헨폭동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1930년 뵘의 아내가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뵘은 “히틀러에게 이 사실을 전할 것”이라고 말하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즈음 뵘은 콘서트 도중 ‘하일 히틀러’ 경례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치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적 투표를 실시했을 때 “우리 총통(히틀러)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않는 자는 독일의 영예로운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고 평론가 레브레히트는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는 못했다.

 

드레스덴에서 음악감독을 하던 시절 뵘은 나치 정권과 그 문화정책을 찬미하는 발언을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1939년 뵘은 독일 예술인 조합 신문에 히틀러 50회 생일을 기념하는 축사에서 “교향악 작품의 범주 내에서 현대음악의 향방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제시하고 그 길을 닦았다”고 기고했다. 한편, 나치는 뵘이 채택한 현대음악 작품을 탐탁치 않아했다. 뵘이 나치에 반대하는 연출가, 무대미술가와 거리낌없이 공동작업 하는 모습도 싫어했다. 뵘의 이러한 행동은 나치 치하에서 예술적 자유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용감한 시도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역사가 마이클 H. 케이터는 뵘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치에 대한 저항이냐 동조냐 공헌이냐의 사이에서도 여러 상충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치냐 나치가 아니냐로 결정적인 낙인을 찍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뵘의 지휘 동작은 언제나 소극적이었다. 좋게 말해도 결코 맵시있는 지휘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카라얀 스타일의 지휘와 달리 외부적인 효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음악이 요구하는 내용만을 지휘에 담는 것에 몰두한 결과다. 카라얀이 뵘의 85세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옛 선승은 화살을 쏠 때 ‘내가 화살을 날린다’고 말하지 않고 ‘화살이 난다’고 했습니다. 무위의 경지입니다. 마찬가지로 뵘의 지휘는 ‘음악이 샘솟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뵘을 따라서 연주가 저절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뵘 지휘의 매력은 악보에 충실하며 작곡가의 의지에 따르려는 노력과 각각의 음악작품 하나하나의 템포를 어떻게 가져가는가, 그리고 피날레의 절정에서 어떻게 모든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확실히 결정돼 있는 상태로 지휘에 임한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특히 만년이 되어서 더욱 성숙해진 뵘의 해석에서 보면 선율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2바이올린 섹션이나 비올라 섹션을 두텁게 가져가는 연주가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꾸밈없고 소박한 지휘. 뵘의 지휘봉은 음악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다. 실제 연주에서의 뜨거운 교감도 뵘 지휘의 장점이다. 청중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 없이 펼치며 연소도 높은 연주를 펼치는 뵘이기에, 2000년대 이후 Altus나 Palexa 등 레이블에서 발매된 라이브 음원이 그동안 다 보여주지 못한 뵘의 진면목을 노출하며 더욱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겠다.

 

무대 위에서 뵘이 보여준 엄격한 태도는 가수와 단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지휘할 때 오케스트라의 특성에 연연하지 않고 계획대로 연습에 몰두했다. 단원들에게 전달할 때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적 리듬, 다이내믹, 음정 등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음악의 토대를 탄탄하게 굳혀가며 리허설을 진행했다고 한다.뵘의 표현은 아주 솔직했고 때로는 독설을 섞어가며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그를 심술궂은 지휘자로 파악한 단원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뵘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음악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빈 필의 명 콘서트마스터 게르하르트 헤첼 등 실력 있는 단원들이 뵘에게 보낸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한다. 오페라 무대에서 뵘에게 인정받아 이른바 ‘뵘 패밀리’로 불리던 가수들은 뵘이 지휘하는 오페라 제작에서 연습에서 실전까지 일관성을 띠고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연주 상태를 실현해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 오페라 최고의 가수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카라얀 지휘 오페라에도 단골로 출연했다.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리자 델라 카사, 에디트 마티스, 에디타 그루베로바, 루치아 폽, 비르기트 닐손, 귀네트 존스,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드비히,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 페터 슈라이어, 볼프강 빈트가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헤르만 프라이, 발터 베리 등이 ‘뵘 패밀리’에 속한다.

 

뵘이 남긴 방대한 레코딩 유산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DG에서 1960년대 모차르트 교향곡 전집과 빈 필을 지휘하여 1971년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남긴 것은 뵘의 큰 업적이다. 1955~1956년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지휘 로열 필이 첫 테이프를 끊기는 했지만 뵘이 견고한 리듬으로 이끈 모차르트의 교향곡 전곡 녹음은 클래식 음악계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또 뵘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분야는 오페라였다. 특히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 피리] 등은 놓칠 수 없는 일류의 해석이다. 테너 페터 슈라이어는 뵘의 [코지 판 투테]를 극찬하고 “다른 지휘자 아래서는 이 정도의 감격을 맛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1971년 빈 필과 녹음한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죽음을 앞둔 모차르트의 진심을 그대로 투과시키는 깊이 있는 해석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이다.

 

모차르트의 작품 외에도 뵘이 해석한 슈베르트, 바그너, 브루크너,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들은 한질의 교과서로 평가된다. 소박하고 우직한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교향곡 해석, 고전적 조형감이 뛰어난 브람스 교향곡들은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할 음반들이다. 뵘의 활기있고 꾸밈없는 바그너 해석 방식은 헤아릴 수 없는 지지자들을 낳았다. 비르기트 닐손은 "지금까지 33명의 지휘자와 함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노래했지만, 그 누구도 뵘에 비견할 만한 분은 없었다"고 쓰고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에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뵘이 음악사에 남긴 업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 중 하나다. 뵘은 자신에게 헌정된 슈트라우스 오페라 [말없는 여인](1935), [다프네](1938)의 초연을 이끌었으며, 슈트라우스 주요작들을 모두 녹음했다(가끔 스코어에 삭제를 가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물론 빈과 드레스덴에서 지휘할 무렵 정기적으로 슈트라우스 오페라를 강력한 캐스팅으로 공연하곤 했다. 뵘의 슈트라우스 해석은 루돌프 켐페의 지휘와 더불어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중적이지 않은 분야이긴 하지만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룰루] 등이 오늘날 같은 명성을 얻기 이전부터 뵘은 최고의 해석가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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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