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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 4 Impromptus D.899, Op.90-4

Arthur Rubinstein

  

 

 


Maria João Pires


Sergei Rachmaninov


Alfred Brendel


Sviatoslav Richter


Vladimir Horowitz


 

 

 


 Arthur Rubinstein(1887~1982)

 

80여년 동안 전세계의 청중 앞에서 태양처럼 군림해왔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영토에서는, 밤의 세계를 지배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세상을 양분한 듯, 그 어떠한 비르투오소도 마음껏 활개를 치지 못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마음에서 마음으로(베토벤이 [미사 솔렘니스]의 악보에 적어놓은)” 전달되는 직접적인 음향을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이 갖는 우월함은 곡예에 가까운 개인기 때문이 아니라 획기적인 전달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완벽한 전달력은 물론 완벽한 테크닉에서 비롯된다. 힘차면서도 서정적인 그의 톤은 화려한 생명력을 머금고 높은 표현력을 발산한다. 감성은 그의 예술세계의 또 다른 측면이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인 1894년 폴란드에서 가진 데뷔 리사이틀로부터 그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1976년 런던 위그모어 홀까지, 루빈스타인은 항상 열정과 유쾌함, 부드러움을 갖고 연주회에 임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심오한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놀라운 테크닉은 거대한 음악적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어떤 작품이라도 구조와 논리에 대한 이해를 우선시하여 극도의 명료함을 통해 그 음악의 정수를 청중들에게 전달해 준다.

 

그의 레파토리는 대단히 넓다. 바흐,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슈만, 리스트에서부터 시마노프스키와 프로코피에프, 빌라-로보스, 파야, 스트라빈스키([페트르슈카] 피아노 버전은 루빈스타인을 위해 편곡한 것이다)에 이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을 자신의 스타일과 관점으로 용해시켰다. 특히 그의 터치에서 기인하는 남성적인 강인함과 아폴로와 같은 광채, 엄청난 크기의 손이 건반 위의 먹이를 낚아채듯 수직하강하는 다이빙 포즈, 거인과도 같은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청중을 압도해버리는 옛 시대 특유의 카리스마 등 그의 피아니즘은 음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밝음 그 자체를 대변했다. 낙천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연주회와 레코딩을 통해 자연스러우면서도 강제하지 않은 사운드가 주는 온화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쇼팽’이 있었다.

 

 

 

 

루빈스타인의 쇼팽 연주는 어떠한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는다. 굳이 수식을 하자면 정통 폴란드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요제프 호프만처럼 가장 개성적이고 초인적인 동시에 폴란드의 음악임을 상기해낼 수 있는 분위기를 그는 창조해냈다. 분명 루빈스타인의 쇼팽은 알프레드 코르토의 쇼팽보다는 덜 귀족적이었지만, 그만큼 더 폴란드에 가까운, 훨씬 인간적인 연주였다. 그가 특별히 특정 유파를 계승하지 않고 거의 독학으로 자수성가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배경이 그를 더욱 독창적인 음악 세계로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선천적 재능과 천재적인 기억력 덕분에 평소 연습을 잘 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덕분에 젋은 시절에는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1920년대 무렵 명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의 연주를 들은 이후 쇼팽 연주의 새로운 경지를 깨닫고 연습에 매진하게 된다. 이후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무미건조한 것, 고상하거나 의미없는 것을 배격하면서 테크닉을 넘어선 테크닉의 참된 경지를 탐구했다.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올 때까지 자신의 음악관과 기술을 연마했다. 그 결과 힘차면서도 맑은 음향으로 가득 찬 그의 새로운 쇼팽 연주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이것이 현대적인 쇼팽의 출발점임을 수긍케 했다.

 

 

쇼팽을 제외하고는 호로비츠와 레퍼토리에 있어서 거의 겹치지 않았다. 루빈스타인은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호로비츠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던 피아니스트다. 물론 호로비츠의 경이로운 테크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은 “더 나은 음악가”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한편으로는 타당한 이야기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토록 협주자이자 앙상블리스트, 솔리스트로서 음악의 모든 것을 즐겼음은 물론이거니와 유쾌한 동료이자 친근한 돈키호테로서 술과 음식, 여자와 시가, 투우와 여행 등등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실천한 전인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Martha Argerich with Arthur Rubinstein

 

1887년 1월 28일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로지(Lodz)에서 태어난 루빈스타인은 부유한 공장주의 일곱 번째 아이었다. 두 살 때 이미 피아노를 가지고 완벽한 피치를 내려고 부단히 연습했던 그는 네 살 무렵에는 이미 신동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네 살 배기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듣고 그 재능을 확신한 요제프 요하임은 로츠에서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도록 충고하는 한편, 베를린에서 칼 하인리히 바르트 교수(리스트의 제자로서 빌헬름 켐프의 스승으로도 유명함)를 소개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렇게 위대한 학습 전통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아르투르 니키쉬 지휘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여 데뷔 무대를 갖게 되었고 프리츠 크라이슬러, 페루치오 부조니, 오이겐 달베르, 외젠느 이자이 등등 베를린에 거주하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1904년 12월 파리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 루빈스타인은 쇼팽과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생상스를 포함하여 모리스 라벨과 폴 듀카, 자크 티보, 페도르 샬리아핀 등등과 교분을 쌓았다. 유럽 연주 여행을 마친 뒤 1906년 1월에는 뉴욕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1912년에는 런던 데뷔 무대와 2년 뒤에는 스페인 데뷔 무대 또한 성공적으로 마쳤다.

 

 

 

 

파리에서 거주하는 동안 그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엑토르 빌라-로보스, 다리우스 미요, 에르네스트 블로흐, 마누엘 드 파야, 피에르 몽퇴, 파블로 카잘스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과 우정을 나누게 된다. 특히 1차대전 동안 런던에서 반주자로서 이자이와의 연주여행을 다녔던 것은 그의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그의 성공과 환대는 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재능과 타고난 인간성 덕분이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 사이는 루빈스타인에게 대단히 바쁜 시기였다. 새로운 피아노 스타로서 진정으로 각광받기 시작함과 동시에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웨일스의 왕자와 러를랜드의 공작부인, 로쉴드 남작, 폴리냑 왕비, 그라몽의 공작,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코코 샤넬 등과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의 여행은 유럽과 아메리카에 국한되지 않고 아프리카와 터키, 이집트, 이스라엘, 일본, 상하이, 베이징, 싱가폴, 홍콩, 마닐라, 자바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1932년에는 6년에 걸친 연애 끝에 폴란드의 명지휘자 에밀 밀나르스키(Emil Mlynarski)의 딸인 아니에라 밀라르스키와 결혼에 이르게 되었고 1928년에는 런던에서 브람스의 카프리스와 쇼팽의 왈츠를 최초로 전기 녹음하기에 이른다. 이후 1930년대에는 HMV의 대표 피아니스트로서 각종 협주곡들과 쇼팽의 작품들을 전곡녹음하며 뭇 기존 대가들을 제치고 음반 산업계의 다크호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34년 여름부터 프랑스의 한 산골 마을인 성 니콜라 드 베로체에 은둔하면서 그는 자신의 음악에 변화를 주며 새롭게 태어난다. 1958년 루빈스타인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나는 음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가치,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죠. 지난 3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연주해온 바로 그 음악들로부터 말입니다. 그 동안은 내가 연주하는 방식에 만족해왔죠. 그러나 더 이상 만족해서는 안되었죠. 이전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식과 관점을 찾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도 충분히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1937년 5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돌아온 ‘새로운’ 루빈스타인은 다시 한 번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대를 받기 시작했고 당연히 그의 개런티는 몇 배 이상으로 뛰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RCA와 전격 계약을 맺으며 피아노가 할 수 있는 모든 레파토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밀리언 셀러로서 수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쇼팽을 포함한 거의 모든 낭만주의 레파토리를 포함해 고전과 현대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했다. 쇼팽의 전작품과 피아노 협주곡,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소나타들, 바이올린과 첼로 소나타, 슈만, 리스트, 브람스의 협주곡들과 독주곡, 실내악, 생상과 드뷔시를 비롯한 프랑스 작곡가들,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콥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 스페인 작곡가들과 남미 작곡가들이 포함되었다. 더군다나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와 첼리스트 엠마누엘 포이어만(그의 이른 서거 이후에는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으로 구성된 저 전설적인 ‘백만불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세계에서도 감히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녹음 작업을 좋아했던 그는 특히 후대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에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 레코드를 듣고 열광했죠. 그러나 몇 개월 뒤 레코드를 통해 내 자신은 변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죠.” 총 82권에 달하는 그의 컴플리트 레코딩 박스(RCA)를 일별해 보면 그의 엄청난 레파토리와 더불어 음악에 대한 놀라운 애정과 관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56년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를 가진 뒤 1976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매년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100여개가 넘는 도시를 방문(66년에는 서울에서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다)하여 연주회를 열었다.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찍는 듯한 그의 손 동작은 여전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어떤 작품이든지 유려하고 낭만적인 감수성을 자아냄과 동시에 짜릿한 흥분을 선사했다. 특히 본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쇼팽 해석은 대단히 극적으로 변화해갔다. 30년대에는 비르투오소로서의 진면목을 과시하려는 듯 숨막힐 정도의 과열된 열기를 뿜어냈고, 50년대에는 형식과 내용이 완벽한 균형을 자랑하는 견고한 음악 구조물로서의 위엄을 뽐냈는가 하면, 60년대 이후에는 정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보다 폴란드적인 정서와 행간의 숨어 있는 의미를 드러내는데 치중했다.

 

 

그가 시대별로 세 차례에 걸쳐 남긴 마주르카, 녹턴, 스케르초, 왈츠, 폴로네이즈 전곡, 그 이상 녹음한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연습곡 전곡은 녹음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은 정체를 거부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모색했던 한 예술가의 위대한 초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대에 일명 ‘협주곡의 왕’이라고 일컬어졌던 그의 엄청난 크기의 손과 다부진 팔은 크고 강력한 사운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초인적인 포르티시시모가 터진 뒤 펼쳐지는 서정적인 패시지에서는 그 누구도 비할 바 없는 명료함과 다채로움을 구사했다. 진정한 비르투오소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강인한 정신력과 음향을 보여주듯이 루빈스타인 역시 70세, 75세, 80세, 85세를 거치면서도 생명력과 힘이 점점 더 배가되어갔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은 그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젊기에 음악 또한 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마치 모든 음악을 처음 연주하듯이 연주한답니다.” 바로 이 ‘젊음’이야말로 그의 연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환희이자 연주자 자신이 평생에 걸쳐 찾고자 한 인식의 샘이었던 것이다. 그의 손이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더 부드럽고 영롱한 음향을 들려주었던 루빈스타인은 더 아름다운 음향을 찾고자 1982년 12월 20일 96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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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