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

« 2024/10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013. 3. 28. 12:24

이기고 지는 것 청구동 시절/나의 가족들2013. 3. 28. 12:24

 

 

옛말에 자식을 키우다보면 미운 다섯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지금은 그 시기가 앞당겨져서 미운 세살, 죽이고 싶은 다섯 살이라고 한다.

아들이 겨우 세 살 때이다. 밉기는커녕 더 이쁘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말을 안듣는 건 사실이다.

아내가 버거워한다. 힘들어서 울기까지 한다.

이쁠 때는 한 없이 재롱을 피우다가 어느 순간 뺀질거리며 반항하는데 아빠인 나도 속이 뒤집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자녀를 낳아야 하는 이유는 자녀가 주는 기쁨이 자녀가 주는 슬픔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미운 세살 박이 아들에게 매질을 했었다. 하늘같은 엄마에게 대들고 맞먹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말로 타일르려 했지만 이 놈이 아빠 말을 무시하고 아빠를 보지도 않으면서 "아빠한테 안갈거야"라고 반항을

하는게 아닌가?

그래도 인내하고 5번을 말했다. 오지 않았다.

애를 번쩍 들고 방으로 들어가 준비된 매로 엉덩이를 때렸다.

나는 정말 살살 때렸는데 이놈은 무슨 야구방망이로 맞은냥 아프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순간 움찔했다. "내가 너무 세게 때렸나? 아니야 여기서 멈추면 이 놈에게 지는거다"

여전한 강도로 다섯 번을 때렸다.

때릴 때마다 "아빠 미워, 아빠 미워"하며 내 가슴을 쳤다.

"아빠 밉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나도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나는 정말 좋은 아빠이고 싶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13년 전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까지도 나는 부정父情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더욱 부정에 대한 아쉬움을 내 아들에겐 남기고 싶지 않아서 좋은 아빠가 되려고 했다.

많이 안아주고, 대화하는 아빠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놈이 아빠가 밉단다. 그만 때려야될까 갈등이 일었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매를 멈춰야하는가? 하지만 난 계속 때렸다.

 

애 입에서 "잘못했어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때렸다.

드디어 아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냈다. 다시는 엄마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믿지 못할 회개를 받아냈다.

그런데 나에겐 승리자의 희열이 없었다.

조금 더 타일러봤으면 하는 후회, 엉덩이는 괜찮나 하는 걱정으로 맥없이 방을 나왔다.

벽을 본채 손을 번쩍 들고 벌을 서는 아들을 뒤로한채....

자식 똑같이 올라간 손인데 기도하는 손은 자꾸 보고싶었는데, 벌서는 손은 보기 안쓰럽다.

 

 

사랑이란 이기고 지는 것의 절묘한 균형이다.

어디서 이기고, 어디서 져야하는지를 바로 알 때 사랑의 대상을 건강하게 성장시킨다.

 

이기는 사랑.

무조건 이기려고 할 때 아이는 주눅이 든다. 눈치를 본다.

권위를 갖고있는 자의 허락이 없는 어떤 행동도 하지않으려 한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가슴에 숨긴채 살면서 언제나 답답해 한다.

일탈을 꿈꾸면서 상상 속으로 수없이 반항하는 자신을 그려본다.

다른 사람의 삶이 부럽기만 하다.

다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펼치며 사는 것처럼 보인다.

 

무조건 이기려는 연인도 있다.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신경질을 부리는 연인이 있다.

매일 전화하지 않았다고 남친을 들볶는다.

머리스타일을 자기 허락없이 바꿨다고 삐져서 데이트도 안하고 집에 가버리는 밴댕이도 있다.

이성친구는 절대로 친구로 남을 수 없다는 신념하에 애인의 사회적 관계를 고립시키는 사람,

무조건 이기려는 사람과 있으면 피곤하다.

자주 싸우는 연인이 있는가? 누군가 한 명이 무조건 이기려는 사람인게 분명하다.

 

그녀는 너무 이쁘다.

하지만 무조건 이기려는 것 하나가 흠이라고 하면서 이해하며 살려는 남자는 보통 남자가 아니다. 성자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기려하지 말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고난을 이기자.

그이와 주도권 싸움하지 말고 사랑하는 그이와 함께 유혹을 이기자.

 

 

져주는 사랑

무조건 져주면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 안하무인이 된다.

사람을 무시하고, 이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밥맛 인생이 된다.

버르장머리없는 애들은 왕따가 되든지 왕따를 선동한다.

잔머리가 도는 애들은 자신이 왕따 당할 것을 안다. 그래서 미리 왕따를 지목해서 자신에게 돌릴 화살을 피한다.

사회부조리는 부모가 자식을 이겨야 할 때 분명히 이겨주면 상당수가 해결된다.

 

사랑은 무한하지만 선물은 유한하다.

칼을 달라는 아이가 사랑스럽다고 칼을 줄수는 없는거다.

 

여자는 사랑받는 존재이고, 남자는 사랑하는 존재이다.

남자의 매력은 져주는 것에 있다.

약속 시간에 늦은 여친을 보면서 사고난 줄 알았다며 도리어 토닥거려주는 것이 남자의 매력이다.

어울리지 않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왔을 때 "니 주제를 알라"고 면박을 주는 대신

"안 춥니? 다음부터는 따스하게 입고 다녀. 나는 멋보다 자기의 건강이 더 중요해"라며

이 악물고 견디어내는 것이 남자의 매력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의 공처가는 없다.

공처가는 실상 애처가이다.

나도 가끔 성자가 된다. 그녀도 가끔 성녀가 된다.

그래서 가끔 행복하다. 이 가끔의 행복 때문에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기 때문에 져주는 것이라면 애처가를 넘어 성자의 반열에 들어선거다.

 

 

 

 

 

 

 

 

 

'청구동 시절 > 나의 가족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의 댓가  (0) 2013.07.01
청아공원에서  (0) 2013.04.17
여자 마흔, 남자 쉬은  (0) 2013.03.26
이젠 잔소리 좀 그만 하시죠  (0) 2013.02.14
가족  (0) 2013.02.11
:
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