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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6. 16:28

Jane 청구동 시절/Jesus Abbey2014. 3. 26. 16:28

 

 

 

 

예수원에는 적지않은 어린이들이 살고있었다. 아이들이 떼지어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문지방에 걸려 엎어졌을 때 그 엄마는 '뗏지 뗏지'하면서 문지방을 때리는 시늉을 하곤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울다가 금방 울음을 그치곤 했었다.

 

 

예수원 안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있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서울의 명문대 출신도 있었다. 반면 완전히 까막눈인 사람도 있었다. 도회지 의사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란 사람도 있었고 고아원에서 아주 어렵게 생활하던 분도 있었다. 간질을 앓고있는 청년은 자주 발작을 해서 도시에서 곱게만 자란 난 그런 일들을 가까이에서 목격할 때마다 경기하듯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자주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 Jane(예수원 원장 부인)은 나에게 참으라고 말을 하며 내 마음을 다독거려 주었다.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 각기 다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지내니 어찌 갈등이 없으랴.

 

사람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마음이 약해지고 그래서 자격지심과 피해 의식이 더 커지듯이, 나는 예수원생활 당시 참 마음이 옹졸해져서 고깝고 서러운 일이 많았다. 그런데도 자존심은 있어서 표현하지 않고 있자니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송이송이였다.

"아이구, 저런 좀 심했다."

"아, 그 사람은 안되겠다. 정말..."

내 편을 들어주는 Jane같은 사람을 만나니 유치하게도 난 신이 났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마음껏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그간 쌓인 불만이 늘어졌었다.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리는 내게 Jane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줌은 물론 "목 좀 축여가며 하셔"하면서 마실 것도 주시고 "이것 좀 먹고 하셔"하면서 과일까지 깍아주셨다.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그녀는 영어 반, 한국어 반 섞어가며 하는 나의 말을 마치 다 알아듣는다는 식으로 리액션을 해주었다.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들어주는 사람 있지, 먹을 것 공급되지, 할 말 많지.. 삼 박자가 고루 갖춰져 내 속풀이 한 마당은 멈추지 않았다. 시계가 열 시를 넘을 때는 열한 시까지만 해야지 했었다. 그런데 가속도가 붙으니 내가 속으로 정한 시간이 자꾸 밀려나는데... 그런 그날 밤 난 정말 푸~욱 잤었다. 모처럼 개운한 잠을 잔 다음날 아침 나 때문에 수면 부족으로 눈이 때꾼해진 그녀에게 얼마나 죄송하던지..

"어제 제가 너무 주책없이 말이 많아서 못 주무셨죠?"

내 말에 Jane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으셨다.

그때 내가 얻었던 인생의 교훈..

<어려울 때 옆에서 고개 끄덕여주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그게 힘이 되는거야>

 

그러나 Jane은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에 머물지 않았다. 내가 감상주의에 빠질 것 같으면 얼른 주의를 환기시켜 주기도 했었다. 사람은 누군가 내 얘기를 잘 들어주면 신이 나고 흥분하게 되고 실컷 쏟아놓고 나면 좀 계면쩍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고픈 말을 속에 품고 있으면 홧병이 날 것 같았으니 어쩌랴. 이상하게도 말해놓고 나면 별거 아닌데 말을 안하고 있으면 그게 가장 중요한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Jane, 맨날 힘든 얘기만 늘어놓아서 미안해요."

"천만에,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으니까 맘 놓고 얘기해요. 이야기를 다 해놓고 나면 그 일과는 무관해 질 때가 있어요."

입으론 정리되었다고 말해놓고도 '무관한가' 하고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있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난 아픔을 겪고있는 사람이 그 아픔을 이겨내게 하는 데에는 몇 단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 첫 단계가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다.

문지방에 걸려 우는 아이에게 엄마가 '뗏지'라고 해주면 심리적으로 덜 아프다. 실제적인 아픔은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커지는 것이다. 누가 나의 아픔을 알아주고 함께 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우리의 할머니가 우는 아이한테 '우리 착한 애기한테 누가 그러냐'하면서 허공을 향해 호령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 일일 것이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누구나 마음이 약해지고 약해진 마음은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로 단박에 회복되지 못한다. 이것은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어린아이가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자기의 아픔을 밖으로 즉시 표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가 그것을 우는 것으로 표현한다면 울 수 없는 어른은 말로써 풀어야겠지.

 

상처는 붕대로 감아두면 바깥 바람을 쐬지못해 곪기 쉽듯이 마음의 상처 또한 밖으로 드러내어 위로받는 가운데 아물기 시작하는 것 아닐까. 젊은 한때, 내 인생의 멘토와 같았던 Jane.. 오래 전 사순절 어느 아침에 그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Jane할머니는 이미 내 곁을 떠났다. 힘든 일이 있어 내 맘에 무거움을 털어놓고 싶을 때 마다 난 그녀가 생각난다. 이 세상에 영원히 함께 할 멘토가 누가 있나. 사순절이다.  

 

 

 

 

내 마음의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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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