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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0. 17:11

길들여지기 청구동 시절/혜화동학창때2013. 3. 20. 17:11

 

 

 

 

몇 년 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책의 내용은, 변화하지 않으면 급변하는 세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고 변화의 출발은 익숙한 것을 버리는 용기에서 비롯됨을 강조했던 자기혁신서로 기억된다. 그때 이후 나는 익숙함은 변화의 걸림돌이고 발전의 착고가 된다는 부정적 이미지의 대명사로 생각된 것같다. 그러나 결별 선언만이 변화와 성장을 위한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인간은 허물을 벗으며 성장하는 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익숙함을 벗어 던져야 할 허물로만 이해할 때 사람다움의 유물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말한다.

"내려와서 나랑 같이 놀자"

그러자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 너무 슬퍼서 너랑 같이 놀 수 없어.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어린 왕자가 다시 여우에게 물었다.

"길들여진다는 게 뭔데?"

"길들여진다는 건 서로 익숙해진다는 말이다.... 길들여지면 나는 너한테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는거지."라고 여우가 말했다.

 

익숙함이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익숙함의 노예가 되고 싶다. 그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건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긴머리의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순간 나는 그 여학생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 수업시간에 딴청 피우기로 유명했던 나는 그녀를 본 그날 수업 자체를 포기했다. 나는 첫 눈에 반해버린다는 말을 믿는다. 다음날 난 아침 6시 50분에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그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몇 대나 보냈을까? 그녀가 나타났다. 시계를 보았다. "7시 10분". "음~ 7시 10분"..그 다음날도 역시 아침 6시 50분에 버스정류장으로 내달았다. 7시 10분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를 처음 본 이후 나는 7시 10분에 길들여졌다. 7시 10분까지 나는 그녀를 기다리는 묘한 설렘을 매일 아침 즐기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를 기다리는 날 동안은 단 한 번도 늦잠을 잔 적이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빨리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호통과 매, 그리고 물벼락도 이루지 못한 지독한 나의 게으름을 사랑이라는 추상이 몰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설레임의 아침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두 달 정도 흘렀을까? 그녀가 더 이상 버스 정류장에 나오지 않았다. 이사한 것일까? 다른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나 싶어 한 정거장 밑으로, 때론 위로 가보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된 이후 나는 버스 한 두 대를 그냥 보내는 습관이 생겼다. 7시 10분 전후로 몇 대의 버스를 보낸 뒤에야 버스에 올라타곤 했다. 그녀를 보지 못하고 버스를 탈때마다 기사 아저씨에게 물었다. "이 버스 혜화동가요?" 분명히 그 버스인데 다른 버스처럼 여겨졌다. 어색했다. 불안했다.

 

어색함은 별리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랑없는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매일 자던 방이 텅 빈 것처럼 여겨지고, 집이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사랑이 떠난 다른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강요이다. 어색함이 익숙함이 되려면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어야 함을 비로서 알았다. 지금 그녀를 보지 않았음에도 자신있게 버스를 타는 것은 그녀를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없는 세상에서 난 또 다른 사랑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나는 참 많은 사람에게 익숙해 있음을 안다. 그들이 보이지 않으면 하루가 왜 이리 어색한지....

익숙함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만남의 어색함이 있기를 소원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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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