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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18. 16:57

용평에서 청구동 시절/나의 가족들2014. 5. 18. 16:57

 

 

 

"최고의 소화제는 기분좋게 먹는 거란다. 골나서 먹으면 반드시 체한다"

밥 먹을 때 대화를 하는 것은 우리 집의 오랜 습관이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천천히 먹어야 과식도 안하고 좋다는게 아버지의 식사 지론이었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말없이 먹으면 분위기가 꼭 싸운 것 같아서 소화가 안될 것 같다.

 

밥상에서의 사회자는 대개 아버지셨다.

아버진 우리 5남매의 관심사에 대해서 돌아가며 물으셨다.

대답이 단답형으로 끝나는 나로 부터 왠만해선 끝나지 않는 여동생까지 한 순배 돌아가면 대개 밥을 다 먹었었다.

가끔은 아버지가 당신의 경험이나 재밌는 얘기를 해주실 때도 있지만 대개는 우리에게 뭔가를 물어오셨다.

그래서 아버지와 저녁을 같이 먹는 날엔 난 뭔가 말할 거리를 하나 마련해야 했다.

 

나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다.

괴외공부는 저녁 시간에 했기 때문에 중간에 꼭 저녁 때가 끼었다.

그 집은 어찌나 점잖게 밥을 먹는지 숟가락 내려놓는 소리도 조심스러웠다.

아무 말 없이 각자 자신의 '먹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과 밥을 먹는 것이 내게는 고역이었다.

서로 밥먹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 예의이니 그저 밥상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과 팔의 왕복운동만 할 뿐이었다.

낯선 집에서 그것도 명색이 선생인 처지에 떠들 수도 없고 자리는 불편하고 하니 급히 먹는 것 말고는 딴 도리가 없었다.

"전 밥 먹고 왔어요"라고 말하면 내게 배우는 아이는 "공부 끝나면 먹어라"소릴 듣게되니 아니 먹을 수도 없고

그 집만 다녀오면 난 꼭 소화제를 먹어야했다.

 

왜 밥상 앞에서 대화를 나누어야 소화가 잘 될까?

이번 어린이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제일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술취한 모습, 화내는 모습, tv에 넋잃은 모습..

이런 건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답 중에는 '식탁에서 신문보는 모습'이 들어있다.

밥을 먹으며 식구들과 이야길 나누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어디 아이들 뿐일까?

남편들이 말하는 '내가 흔히 듣는 아내의 바가지'항목에도 '밥상에서 신문 보지말라'가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밥을 먹든지 신문을 보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요"

나도 이런 말을 아내에게 몇 번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런 아내의 말이 액면 그대로 묵묵히 밥만 먹자는 것일까?

 

어금니가 있다면 한번 새겨들어 보자.

"밥 먹을 때만이라도 얼굴 좀 마주 봅시다", "얼굴 보고 말 좀 합시다"로 들릴 것이다.

인사로 하는 "언제 식사 한번 같이 합시다"를 놓고봐도 밥상은 곧 말상이다.

가끔 동료들과 식사를 하다보면 한가지 걸리는게 있다.

그건 마음에 잘 맞는 이들과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남들 다 먹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먹게되어

제일 많이 먹는 사람으로 몰린다는 거다.

"자기가 다 말하면 쓰나. 남들한테 말을 시켜야지. 남들이 말할 때 들으면서 먹고.."

아마도 돌아가신 아버진 이렇게 말씀하실거다.

당신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뉴욕에 사는 남동생이 가족들을 이끌고 왔다.

7년 만에 만나는 막내동생인지라, 우리 5남매는 각자의 스케쥴을 조정해 어렵게 시간을 맞춰 강원도 용평스키장엘 놀러갔다.

지금도 우리 5남매는 모이면 어린 시절의 식사 시간은 추억거리가 된다.

큰 누나는 항상 "내가 아주 웃기는 얘기 해줄께"하고는 별로 안 웃기는 얘길 하곤 자기 혼자 막 웃는 게 특기였다.

우린 그런 큰 누나의 태도 때문에 웃었다.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 동사의 어미활용을 배울 때였다.

"오늘 국어시간에 변칙을 배웠는데, '우'변칙 할 때 애들이 못 따라했어. 왜 그랬게? '푸다' 동사 활용 한번 해봐"

우리 형제들은 밥을 먹다말고 별 생각없이 날 따라했다.

"푸다, 푸니, 퍼서, 퍼..."

'퍼'소리가 나오자마자 우리 형제들은 일제히 웃느라 자지러지며 밥알이 입 밖으로 뛰어나왔다.

'퍼'는 그 당시 골목마다에서 수시로 듣던 익숙한 소리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도오옹 퍼!"

 

오래 전의 이 얘길, 용평의 어느 음식점에서 막내가 밥을 먹다말고 끄집어내는 거다.

여럿이 밥 먹으며 '퍼'소리에 식탁에서 웃고 떠들어 품위를 손상당했다.

밥풀이 날아가고 코로 물을 뿜고 난리가 났다.

주위 손님들의 눈총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의 정중한 부탁을 받기까지 했다.

 

놀라운 건 이런 분위기를 주도한게 누이들이 아니라 막내동생이라는 점..

미국물을 십년 넘게 먹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지금도 누이들은 어린 시절처럼 '난리'를 피우진 못하지만, 형제들끼리 밥 먹을 때 조용히 못하는 병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직도 우리 형제들은 밥상 앞에서 품위보다는 소화를 확실히 택하는 거 같다.

 

 

산안개 낀 이른 아침 동생과 산책길에...

The Marriage Of Figaro (Sull' Aria,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 - Berlin Op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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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