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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지방에는 장맛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아침부터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늘은 일찍 교회 다녀와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뒤적였지요. 그러다가 문득 기형도씨의 시집을 들춰냈습니다.

 

 

 

         

대학 시절 /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80년대 초, 나 대학 다닐 때 여학생들은 가방 대신 책을 저렇게 가슴에 품고 등교를 했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캠퍼스에 삼삼오오 모여서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까먹으며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서로서로 단단한 의지가 되었었지요. 그러나 요즘의 대학은 이러합니다. 각 도서관에는 토플, 토익Speaking, 토익Bridge, 토플TESTS, 경제학 원서, 경영학 원론, 회계학 개론 책들이 가득합니다. 대기업의 로고가 붙은 빌딩 숲은 화려하고 그들의 편의를 제공해 주지만, 그곳에서는 인문학 강의 조차 먹고사는데 필요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실용적인 빌딩의 으리으리한 로비를 학생들은 혹여 엎지를까, 커피를 들고 조심스레 지나 다닙니다.

 

학교 돌층계 위에서 요즘 학생들은 플라톤 대신 마이클 샌델을 읽었으며, 그때마다 총성이 아니라 아이돌 팝송이 흘러나옵니다. 목련철이 오면 학생들은 고시원과 군대로, 더러는 어학연수를 위해 외국으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어느 시인 지망생은 부모님 눈치가 극심해서 지난 주 입사 면접을 보고 왔노라고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교수는 힘이 없는지, 아니면 원체 말이 없는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던 학생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요즘 과외와 알바를 하느라 무지 바쁩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그들은 원치않는 비정규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두 차례 휴학해야 했고, 누구나 다 그런 것 같아 요즘 학생들은 스스로 외톨이는 아니라고 위안을 합니다. 그들 중엔 나쁜 학점 때문에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워 3년 째 복학과 휴학을 반복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 상실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대학생들...

 

 

▒ 젊은 날의 초상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춘의 한때, 누구나 한 번쯤은 변주했을 법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보낸 답장 전문이지요. 헤르만 헤세는 싱클레어의 방황을 길게 묘사합니다. 쾌락과 금욕 사이에서 고뇌하던 싱클레어는 마침내 방황을 끝낸 뒤, 한 마리 새를 그렸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는 매였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이루고자 했던 또 하나의 자아인 셈이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이 새로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지금 안주하고 있는 세계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 정도의 간절한 마음없이 변화되기란 어렵습니다. 새가 알을 깨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듯, 사람 역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만큼의 고통을 느끼고 인내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떤 학생은 가슴을 쥐어짜면서 털어놓습니다. "난 대학졸업하는 대신 배나 탈거야."라고 내뱉자 엄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답니다. 며칠간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엄마의 표정이 어두웠고 그제야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는 못했지만, 공부를 그만둬서는 안 되는 이유는 찾았답니다.

 

나도 때론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새벽별을 보며 등하교를 했었습니다. 1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문제집을 풀었었고, 그렇게 나는 돋아나오던 나의 날개를 대학에 가면 펼칠 것이라면서 접어두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하지만 대학에 들어갔어도 여전히 알을 깨지 못했습니다. 대학시절 공부는 커녕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수십 군데 원서를 썼지만 토플 점수조차 변변치 않은 인문학 졸업생을 달가워하는 그럴듯한 기업은 없었습니다.  조그만 회사를 3개월 정도 다닌 뒤 그만뒀지요.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스물아홉 살에 간신히 첫 번째 취직을 했었습니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열아홉 살 소년은 '남들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아냐?'고 반문하는 아저씨가 된 것입니다. 그간 새로운 지식을 얻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삶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보았고, 가족과 안정된 직업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이니?"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고 추억은 보배로운 것이었다.

실패도 과오도 많았지만 나는 절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 내 젊은 날의 초상 中에서 / 헤르만 헤세

 

 

▒ 헤르만 헤세와 음악

 

 

 

인간 존재의 근원에 배반하는 이원성과 맞서 영혼의 자유와 인간성의 고귀함을 아름다운 글로 풀어낸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 1946년 노벨문학상 및 괴테상을 받았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내면적인 문학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의 주옥같은 대표작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젊은 날의 초상>등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헤세의 그림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습니다. 그가 그린 것은 오로지 말없는 산, 강, 풀, 들꽃들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들판에 누워 종일 바라보았던 구름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웃음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춤추기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헤세의 그림들은 대체로 따뜻하고도 온화한 동화책같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헤세는 그들을 그리면서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마음으로 그렸으리라..여겨집니다.

 

 

 

 

 

 

수많은 작가 중에서도 특별히 내가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 속엔 평화주의적인 세계가 그려있지요. 그평화주의자였습니다. 조국 독일의 군국주의가 일으킨 제 1차 세계대전때도, 히틀러의 나치즘이 광분하던 2차 세계대전 때도그는 전쟁을 반대했고, 그래서 조국의 배신자, 매국노라는 언론의 지탄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저서는 판매금지와 출판금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조국의 비난은 헤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태어나고자 편히 안주할 수 있는 알을 깨뜨립니다.

 

또 하나,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엔 음악의 정신이 깊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헤세의 서정시나 산문을 보면 음악적인 선율과 리듬이 가득차 있으며 그의 소설 역시 음악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학으로 내적인 성숙을 키워가던 서점 점원시절... 헤세는 자기의 방에 니체의 사진과 쇼팽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시절 헤세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니체에게 바그너라면 나에게는 쇼팽입니다. 혹은 그 이상입니다. 나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의 모든 본질적인 것은 쇼팽의 따뜻하고 생동감 있는 선율, 자극적이면서 날카로운 화음, 보통이 아닐 정도로 매우 친밀감있는 그의 음악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질의 귀족성, 자제력, 완벽한 우월성에 항상 놀랍니다. 많은 것이 타락될 지라도 그에게는 모든 것이 고상합니다."

 

헤세는 자기의 시를 작곡했던 당대의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와 쇼팽의 훌륭한 해석자였던 부인 마리아 베르눌리의 피아니즘을 통해 쇼팽의 음악에 보다 더 깊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피아니스트였던 부인이 저녁 나절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헤세는 쇼팽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지요.

 

쇼팽의 녹턴 1번, 그리고 3번이 흘러 나온다. 유리처럼 매끄럽고 수줍어하는듯한 음, 불명확하고 꿈속을 헤메는듯한 박자, 절묘하게 짜여진 우아한 악상, 일그러진 듯한 화음, 화음과 불협화음을 더이상 구별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한계가 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몽유병자처럼 헤매면서 그 가운데 달콤하고 부드럽고 천진난만하게 순수한 선율이 가느다랗게 흐른다. 쇼팽! 이 음악은 향수와 동경과 회상으로 가득차 있다.

 

쇼팽의《녹턴 Eb major》...
아름다운 여인이 제비꽃다발로 장식된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할 때 헤세는 음악의 신비스런 고통과 부드러운 감성의
세계를 느꼈다.

 Nocturne No.2 in E flat, Op.9 No.2  

 

  

쇼팽의《발라드 G minor》...
헤세는 별빛이 비추는 방안에서 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감미롭고 슬픈 추억이 스쳐지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Ballade No.1 in G minor Op.23


쇼팽의《소나타 B minor》...
잠 못 이루는 밤... 고통이 점점 심해져 올 때 쇼팽의 소나타는 헤세를 위로해 주었다.

Piano Sonata No.2 in Bb minor, Op.35

 

 

 

 

자화상

 

 

문학과 그림, 음악에 대한 정처없는 방황과 더불어 삶의 고독과 향수를 그 아름다운 감성으로 써내려 간 헤르만 헤세... 예나 지금이나 나는 헤세를 동경합니다. 그의 서정시에는 쇼팽을 비롯하여 슈베르트의 낭만적인 음악 정신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음악적 흐름과 매혹적인 멜로디, 정서적 마력이 존재하는 헤세의 음악관과 그의 빛나는 문학세계와 인생관...그의 젊은 날의 초상을 나는 흠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젊은 날의 초상.. 열정과 패기, 낭만의 청춘열차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NOCTURN... / 헤르만 헤세

 

 

쇼팽의 녹턴 Eb major

높은 창문 위로 빛이 쏟아지고 있다.

당신의 엄숙한 얼굴 역시

둥근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조용한 은빛 달이 이토록이나

나를 감동시켰던 밤은 없었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노래중의 노래가

말할 수 없이 감미롭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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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