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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17. 16:34

청아공원에서 청구동 시절/나의 가족들2013. 4. 17. 16:34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러 일산 청아공원에 다녀왔다.

우리 5남매 가운데 장남인 나에 대한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과 관심은 이따금씩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기억에 잠기게 한다.

가끔 누나들이 내 얼굴이나 행동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아버지하고 똑같을까"하는 말을 할 때마다

다시 한번 아버지의 형상을 떠올리곤 했다.

'나 닮은 아버지라...'

 

나는 친구를 무척 좋아한다. 친구를 좋아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마는,

내가 친구를 좋아하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가족에 대해서는 그만큼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친구에게는 후하면서 가족에게는 조금은 인색한 사람이 나였다.

친구를 너무 좋아한다는 말이 가족에 대한 무책임, 무능력으로 들렸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친구를 좋아하면서도 친구를 좋아하는 내가 싫었다.

참, 이상도 하지?

대부분 친구들이 많거나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는 사람은 그만큼 가족들에겐 무신경한 부분이 있는거 같다.

 

난 한량 기질도 있다.

대학 시절 마음이 울적하거나 날씨가 너무 좋으면 수업을 제끼고 무작정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그 한량기질이 불끈 가슴을 치고 올라와 일탈의 현장으로 떠나도록 나를 부추킨다.

그래서 아직도 가슴 한켠에는 홀로 떠나는 여행의 그리움이 숨을 쉬고 있다.

물론 한량 기질의 건강한 표현으로 글도 쓰고, 이 악기 저 악기를 배우기도 했지만

무책임하다는 의미의 한량기질론 때문에 아버지가 날 닮았다는 누이들의 말이 싫었다.

 

아버진 좀 생기신 분이셨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에겐 여자들이 좀 꼬였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무역회사를 다니셨던 아버지 옛 사진엔 김태희같은 회사의 모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여럿 있었다.

어릴 때 기억에 어머닌 그 아버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던 적이 더러 있었던 거 같다.

어느날 어머니가 날 부르시더니 "애야, 여자를 조심해라. 그러면 넌 크게 될거야."

 

나는 여자를 모르고 자랐다.

내 누이들 3명에 치여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에게 여자는 지겹고 질리는 존재였다.

미팅도 딱 두 번만 하고 재미없어서 안 할 정도로 나는 여자를 초월한 남자였다.

난 잘 생긴건 아니다.

그러나 특유의 친화성 때문에 청년시절 몇 몇의 여자동창들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나의 친절함에 그녀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가 나중에 아닌 걸 알곤 상처가 된 것이다.

이런 나를 바람둥이일거라고 추측하고 그 추측을 기정사실화하는 무리들 때문에

나는 여자에게 악수하는 것 조차 눈치를 봐야 할 때가 있었다.

 

기억은 관리되고 통제될 수 있음을 안 것은 신이 주신 축복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멋있고 훌륭한 분으로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와 누나들의 추억담때문이다.

누나들은 한 번도 아버지의 실수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진 언제나 자식을 끔직히 사랑해서 학교에서 바짓바람의 원조격이었다고 하고,

대인관계가 좋아서 친구가 참 많으셨다는 훈훈한 기억만을 누나들은 말한다.

아버지라고 왜 실수가 없으셨겠는가?

어머니와 큰 누님이 대화하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아버지 험담. 그러나 정말 순간이었다.

장남인 나를 보며 다시 아버지의 훈훈함을 나누셨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진실한 과거를 캐묻지 않고 있다.

나에게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상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멋있는 이유가 단 하나 밖에 안되더라도 난 그 하나를 붙잡고 아버지를 상상하고 싶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이상이어야 한다.

아버진 돌아가시면서 환한 웃음으로 어머니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하늘나라로 가셨다.

"여보,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어"

 

지금은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게 뿌듯할 뿐이다. 아내가 나를 괜찮은 남자로 봐주기 때문이다.

아니, 나의 강요와 협박에 굴복했다는 말이 맞을거다.

난 수시로 아내와 애들을 세뇌시킨다.

저녁에 퇴근하면서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다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애들아, 너희들 아빠같은 사람없다"

"아내여! 자네는 날 만난 걸 축복으로 여겨야 해"

"내가 반찬 투정을 해, 바람을 펴, 외박을 해, 술을 해..."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아내와 애들의 기억에 좋은 아버지, 남편으로 남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부지런히 아내의 기억을 관리해주고 있다.

"여보, 제발 애들 앞에서 내 험담 좀 하지 말아주세요. please"

"나와 둘이 있을 때에는 무슨 욕이라도 들으리라.."

 

좋은 부부란 서로의 기억을 아름답게 관리해주는 사람이고,

좋은 맏형이란 좋은 부모의 기억을 동생에게 선물하는 사람 아닐까?

 

  

 

 

Over The Rainbow - Judy Ga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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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