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

« 2024/10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022. 10. 21. 22:25

가을의 도보여행 음악에 부쳐/클래식 칼럼2022. 10. 21. 22:25

 

 

 

빛이 만든 빛이 카메라에 잡혔다. 눈으로 보면 보이지않는.. 오직 카메라를 통해서만 보이는 빛이다. 창문 턱에 걸린 가을의 그림자가 어느날 오후, 내 방 깊숙이 드리워졌다. 방 안에는 리히터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콘첼토 2번> 2악장이 흐르고 있다. 아다지오 악장은 안개가 짙게 깔린 새벽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음악을 듣다가 문득 가을의 빛을 보고싶단 충동에 무작정 가방을 챙겨 시동을 걸었다.

 

 

마치 안개 속을 하염없이 걷듯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바닥에 깔린 희뿌연 추억의 그림자를 밟고 과거로 가는 고속도로를 올라탔다. 나의 삶이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래.. 후회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어차피 안개 속을 헤매다가 낙엽이 지듯 그렇게 마감하는게 인생이다. 헤세도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시로 그려놓지 않았던가.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신비롭도다

덤불도 돌도 모두 쓸쓸해 보이고

나무들도 서로 보지 못하니

모두가 혼자로다.

 

나의 삶이 빛날 때는

세상이 친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안개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이 어둠을 모르는 사람은

정말 지혜롭다 할 수 없다.

피할 길 없이 조용히

만물에서 떠나게 하는 이 어둠을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신비롭도다

인생은 쓸쓸한 존재

아무도 서로를 알지 못하니

모두가 혼자로다.

 

- 헤세 -

 

 

이 시는 헤세의 단편 <가을의 도보여행>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 옛 애인을 찾아 도보여행으로 고향을 찾은 주인공이 쓸쓸히 발길을 돌리며 안개 낀 가을 들판에서 이 시를 읊조린다. 삶의 의미를 모른 채 단 한번 뿐인 생을 마감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 우수에 찬 헤세의 싯구는 실존에 대한 초탈적인 관념이 담겨있어 내 마음을 저리게 한다.

 

 헤세가 그려낸 안개 낀 가을의 고독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곡의 1악장은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엄숙하고 장중한 피아노 독주로 시작되어 열정적인 관현악 연주로 이어진다. 특히 2악장의 달콤하고 감상적인 멜로디는 한(恨)으로 대변되는 우리 정서와도 잘 통할 만큼 애상적인 느낌을 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Moderato

Arthur Rubinstein/피아노

 

힘찬 느낌을 주는 제1악장 모데라토, 서정적인 2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열정적인 코다로 마무리되는 3악장을 듣고 있노라면 망망대해를 헤엄쳐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로맨틱한 멜로디에 실린 러시안 특유의 리리시즘은 메마른 내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은 이 가을의 정취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2악장 Adagio Sostenuto

Vladimir Ashkenazy/피아노

 

3악장 Allegro Scherzando
Vladimir Ashkenazy/피아노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위한 무반주 카프리스>는 바이올린 전공자에겐 바이블과 같은 곡. 훗날 이 곡은 리스트에 의해 <솔로 피아노를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연습곡>으로 재탄생되었으며 브람스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마지막 24번째 곡을 테마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모두 24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무반주 카프리스>의 독특한 주제선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관현악을 동반한 피아노 선율에 다양한 칼라로 실어내어 전혀 새로운 곡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비르투오조의 풍모가 실린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의 화려한 앙상블, 멜로디에 담긴 풍부한 서정은 이 곡의 매력 포인트.

 

 

파가니니, 카프리스 Op.1-24

Itzhak Perlman/바이올린

 

 

 

 

낙엽 속에는 삶과 죽음의 의미가 새겨져 있다. '덧없는 인생'이란 단어는 어쩌면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바라보던 어느 염세주의자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지난 주 내렸던 가을비와 바람에 이파리가 부서져 내린 한적한 도로는 쓸쓸하다 못해 애잔해 보인다. 고전음악이나 문학 속에만 가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중가요 속에도 가을의 슬픈 애상이 담겨있다.

 

다시는 네 모습 볼 수 없다 하여도

너 떠난 그 빈자리 가을은 가고

이 계절 다시 핀 하얀 네 모습

가을 향기 풍기는 얼굴

코스모스 고개들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너 떠난 그 빈자리...

 

낙엽지는 이 계절에 사랑하는 사람까지 떠나 보낸다면 그것처럼 가슴 아픈 일은 없을게다. 떠나야 하는 사람... 보내야 하는 사람... 두 사람 모두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겠지만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이었다면 너무 슬퍼하진 말아야겠지.

 

 

 

 

 

 

Chopin

* Variations ‘Souvenir de Paganini’ (변주곡-파가니니에 대한 추억)

* Vladimir Ashkenazy & Idil Biret/피아노

 

"쇼팽의 변주곡 - 파가니니에 대한 추억"을 듣자니 오래 전 일이 생각난다. 7년 전 쯤 가까운 동료들과 보길도로 가을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다. 시골길 한켠에서 춤추고있는 코스모스가 너무 아름다워 잠시 피곤한 발을 멈추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등산화를 벗고 발을 주무르던 옆의 동료가 '어~~?'하는거다. 양말이 구멍이 난 것이다. 아까 자갈해변을 신을 벗고 걷더니.. 얼른 나도 벗어봤다. 나도 구멍이 나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즐거운 웃음을 짓다가 내가 노래를 불렀다.

 

"내 양말 빵구났네. 빵구난 내 양말

빵구가 안 난 것은 내 양말 아니지.

내 빤스 빵구났네, 빵구난 내 빤스

빵구가 안 난 것은 내 빤스 아니지."

 

 

V1102164003.mp3
다운로드

프랭크 안 노래

 

이것은 내가 어릴 때 부르던 작자미상의 노래다. 위에 올린 쇼팽의 변주곡과 곡조와 리듬이 참 비슷하지 않은가.

가을은 고독과 애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억새를 보아라. 가을의 억새 속에 숨겨진 찬란함이 보이지 않는가. 가을은 모두에게 프리다. 구멍난 양말의 추억을 이 가을이 아니었다면 누가 나에게 주련가.

 

 

 

 

 

 

 

 

 

'음악에 부쳐 > 클래식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에게..  (0) 2022.11.05
그리운 고향을 흥얼거려보다  (1) 2022.11.01
달의 눈썹  (0) 2022.10.08
가을 달에 내 마음을 담아  (1) 2022.09.30
무대 위의 사람 율리아 피셔 2  (0) 2022.09.23
:
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