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

« 2024/10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022. 7. 28. 14:50

라일락 나무 아래 청구동 시절/나의 가족들2022. 7. 28. 14:50

 

 

 대학 1학년 때 교양 심리학을 배우면서 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난 우리 집이 가장 정상적인 줄 알았는데 우리 집도 조금은 문제가 있구나. 우리 아버진 자녀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어' 하고.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온, 공기같은 가족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은 때론 또다른 나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의 가족을 해부하는 일은 피하고 싶어할거다.

 

그러다가 3학년 때 인간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 특별히 부모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첫번 째가 나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와 나를 향한 형제들의 시기심에 대한 이해였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9남매 가운데 맏이인 아버지, 평북 강계에서 월남한 7남매 가운데 5째인 어머니의 결합,

그리고 그 사이에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세대 재생산의 첫 열매였다.

아마도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두 분의 만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실향민으로 과거의 기득권을 다 놓친 부모님은 타향에서의 첫 열매를 통해 이 땅에 당신들의 뿌리를 깊이

박아놓으려는 절실한 기대를 갖고계셨던 듯 하다.

난 위로 누나가 둘, 아래로 여동생이 또 있다.

막내로 남동생이 태어났어도 여전히 집에선 내가 금이야 옥이야, 였던 듯 싶다.

 

국민학교 다닐 때이다.

한번은 수업을 다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거다.

집에 우산이 귀하던 시절이라 그날 아침 어머닌 누이들 몰래 나한테만 가방에 우산을 몰래 넣어주셨었다.

"혹시 오후에 비가 올지도 몰라"하면서.

비가 쏟아지는 운동장으로 우산을 들고 나가려는데 복도 끝에서 여동생과 마주쳤다.

난 비닐우산을 동생에게 씌워주고 비를 흠뻑 맞고 갔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면서 어린 여동생에게 역정을 내셨다.

"오빠를 비맞게 하다니, 이게 어떤 아들인데.."

그날, 여동생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곤 언니들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다.

그 이후로 부터 난 극심한 시기와 질투심, 그리고 많은 견제에 시달렸다.

마치 요셉이 10명의 형들로 부터 그러했듯이.

당시 나와 동생들의 과외선생은 큰 누나였는데, 시험성적이 좀 안 좋아도 동생들은 봐주면서 나는 자 막대기로

꼭 때리는거다.

그래서 지금도 난 큰 누나가 좀 무섭다.

 

아버진 달랐다.

딸들에겐 그토록 자상한 아버지이건만 나에게는 엄격하셨다.

잘하면 당연한거고 못하면 큰일나는거다.

내 공부를 가르치실 때도 늘 비짜루를 옆에 놓고 하셨다.

어느새 난 성적표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 들통나면 매 맞고, 그게 무서워서 집을 피하고

밖으로 돌다보면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책을 팔고 학비를 축내고... 악순환이었다.

 

높은데서 떨어지면 더 아픈 것 처럼, 가끔 내 아이들을 대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아버질 닮아가는구나..

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릴 때 내 경험을 바탕으로 내 자식들을 다독거려야한다고 여기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인가.

 

 며칠 전, 딸아이 학교엘 갔다.

<아버지학교>가 있는 날이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의지로 갔다.

교정에 가득한 라일락꽃 향기를 맡는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진 바짓바람이 드센 분이셨다. 일년에 두 세번은 학교를 방문해 담임선생님을 만나시곤 했다.

그러면 난 교무실 앞 라일락 나무 아래서 잔뜩 긴장을 한 채 아버지가 나오시길 기다렸었다.

 

어버이날이다.

어제 편지 한통이 배달되었다. 아버지학교에서 딸아이가 나한테 쓴 편지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10가지 이유'란 제목의 눈물로 쓴 편지.

그 중에 한가지가 이거다.

'아빠가 안 계셨다면 내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언젠가 나 대학 시절, 아버지가 나한테 이러셨다.

"속이 타서 변을 봐도 염소똥처럼 까맣더라"

그 까만똥을 싸신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의 자리매김이 있는거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

- 한시외전 中에서

 

A Love Idea - Mark Knopler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청구동 시절 > 나의 가족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아버지다  (0) 2022.07.24
어머니의 '조선철학'  (0) 2022.07.07
우리 집 옥상  (0) 2014.07.02
용평에서  (0) 2014.05.18
추억의 댓가  (0) 2013.07.01
:
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