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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1. 12:28

가족 청구동 시절/나의 가족들2013. 2. 11. 12:28

 

 

나는 위로 누나 두명, 그리고 아래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의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 사람들은 의례 "아휴 귀하게 자랐겠군요?"라는...

약간은 남자구실 제대로 할까? 라는 걱정섞인 마음이 풍기는 말을 듣게된다.

우리 집은 대체로 여자들의 말발이 세고 여성 상위의 가정이다.

정체성이 형성되는 10대 시절을 난 기가 몹시 센 3명의 여자 형제들과 아웅다웅, 옥신각신하며 성장했다.

 

나는 나와 비슷한 가족구성원에서 성장한 친구 두 명을 알고 있다.

한명은 중학교, 또 한 명은 고등학교 친구이다.

이 두 친구는 다른 사춘기 남학생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첫째, 소위 코맹맹이 목소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자기를 귀찮게하는 반친구에게 꼭 이렇게 대꾸한다.

깊은 콧소리로 "어으.. 야아"

그러면 반친구들은 닭살이 돋아서 장난을 그만친다.

어떤 짓궂은 친구는 밥맛이라고 뒤통수를 한대 더 때리곤 했다.

그러면 그 놈은 울먹인다.

 

둘째, 울때 반드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운다.

때로 심하게 슬프거나 아플 때는 책상에 두 팔을 올리고 그 팔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울기도한다.

그러면 반친구들은 “이 놈 삐쪘다”고 하면서 등을 두들겨주며 위로해주곤 했다.

사실 남자에게 삐졌다는 말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놈에게는 삐졌다는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셋째, 그들은 뛸때 팔이 앞뒤가 아니라 좌우로 움직인다.

난 맨처음 기형아인줄 알았다.

그러나 운동회때 여자 선생님들이 모두 그 놈처럼 뛰는 것을 보고 그의 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넷째, 팔짱을 끼려고 한다.

남자들끼리는 어깨동무를 할지언정 팔짱은 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놈은 같이 집에 갈 때 코맹맹이 소리로 "신일아" 부르면서 뛰어와서는 팔짱을 낀다.

그것도 팍 끼는 것이 아니라 살짝, 아주 부드럽게,...

그러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에 그 두 놈과 똑같이 여자들 틈에서 자란 나는 정반대였다.

싸우기도 잘하고, 달리기 할때 팔을 앞뒤로 흔드는 준마였고,

무엇보다 팔짱끼는 것을 징그럽게 여기는 대다수 남자들의 정신세계를 갖고 있었다.

적어도 사춘기 땐 난 그랬던 것 같다.

 

어렸을 때의 남동생은 참 예뻤다.

남동생은 학교에서 무슨 캠프나 축제 때 단골행사 중 하나인 여장 미스 선발대회에서 진으로 뽑힌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기본이 갖춰진 얼굴이기에 성형수술 몇 번하고, 화장 좀 잘하면 180cm의 늘씬한 수퍼모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연예인 중 성전환자인 하리수처럼...

그리고 센세이셔널리즘을 타고 돈 방석에 앉아 있을수도 있었을 터인데...란

가끔 말도 안되는 농담을 형제들 끼리 주고받기도 했었다.

 

조금은 부드러운 성품의 남동생은 내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여성적인 느낌을 갖는 식구였다.

그런 남동생은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하며 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랬던 남동생은 지금 미국 뉴욕에서 수백명을 이끄는 리더로 잘 살고있다.

 

사춘기때 난 남동생의 잘 생긴 모습을 참 부러워 했었다.

난 머리가 짱구였고 여드름도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여자들 틈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다운 남자로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누나들 덕분이다.

누나들은 나를 부모님들이 생각하시는 것 처럼 귀한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귀한 남동생으로도 보지 않았다.

오직 머슴으로만 본 것같다.

귀한 아들에게 매번 심부름을 시켰고, 말 안들으면 바로 폭력으로 응징했다.

 

그 뿐인가?

성적이 조금 떨어지면 밤마다 손들고 서 있으라는 엄포에 내 팔은 강인해졌고,

남자놈이 찔찔 짠다는 핀잔과 조롱을 들으며 눈물을 가슴으로 삮이는 법을 배웠다.

싸우다 맞고 들어오면 누구도 나를 때린 놈 집에 찾아가 항의하지 않았다.

다른 집 부모, 형, 누나들은 잘만 하던데 우리 누나들은 도리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칠칠한 놈 남자가 어디 맞고 돌아다니냐?”

 

물론 치료는 해줬다.

치료를 해준 걸 봐서 피를 나눈 친누나임이 분명하다고 믿으려고 노력했지만 왜 이리 서러운지...

더 결정적인 것은 툭하면 "너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는거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안의 독기가 깊어졌다.

"어디 두고봐. 보란 듯이 살테니까...."

 

누나들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는 다름을 안다.

누나들은 나를 남인 것처럼 대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실수나 잘못을 눈감지 않았다.

그래서 난 바르게 살아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함을 배우게 된 것이다.

누나는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때로는 손을 들고 벌을 서는 나를 잊고 잠을 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난 요령껏 잤었다. 융통성을 배운 것이다.

누나는 기분 좋을 때면 비싼 옷도 척척 사준다.

그래서 난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간사함을 배웠다. 아니 배려하는 법을 배웠다.

 

나하고 2년 터울인 여동생은 누나들관 달리 어릴 때 부터 심정적으로 늘 내 편이었다.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물수건과 약을 갖다주었고,

내가 울 땐 말없이 휴지를 갖다주었던 여자친구같은 동생이다.

지금도 내가 힘들 땐 언제나 찾는 동생이다.

남편과 더불어 일본 동경에서 지내고 있는 여동생...

5남매 중에 나하고 제일 닮은 동생..

그 여동생을 통해서 난 사람을 대하는 법,

특히 상담술을 배웠다.

 

 

큰 누나는 다음 주가 환갑이다.

나에게 시를 만나게 해준 둘째누나도 이제 날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말상대도 안되었던 내가 이제는 누나들과 마주 앉아 인생을 논하고 있다.

함께 나이들어가는 것이다.

 

어제 그렇게 우리 형제들은 새해 아침에 다 함께 모여 서로의 나이를 놓고 얘기하며..

서로의 세치를 뽑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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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