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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엔 산, 구름, 물, 나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다 있다. 내가 갇혀있던 도시에선 볼 수 없었던 눈의 형질이 여행길엔 그대로 살아 있다. 운이 좋으면 눈으로 뒤덮인 산골짜기에서 황금빛 노을이라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모든 염려와 문제, 삶의 고단함은 늘 나로 하여금 떠나지 못하게끔 제약한다. 점점이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내 몸엔 기운이 점점 떨어지고 더불어 내 삶의 꿈도 서서히 도태된다.

 

니체는 이렇게 얘기했다. '탈피하지 않는 뱀은 죽는다.' 니체가 얘기하니까 멋있어 보이지만 뻔한 얘기 아닌가. 껍질 벗지않는 뱀은 죽은거다. 뱀은 주기마다 한번씩 허물을 벗는다. 그러면 다시 싱싱한 것이 나온다. 우리도 마찬가지겠지. 탈피, 주기마다 한번씩 탈피해야..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늘 싱싱한 모습으로 살아가 질 수있도록 하기위해... 탈피하라! 벗어나라~! 여행은 매너리즘에 젖어있던 껍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용기이다.

 

'여행은 눈썹도 떼고 가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여행가가 그랬다. 여행은 홀가분해야 한다는 것이며 가장 홀가분한 여행은 혼자 떠나는거라고... 어차피 인생은 단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이 무대의 주인공인 나는 주인공답게 나 자신을 위해서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늘 내 속에서 곱씹어졌었다.

 

 

오랜만에 차 뒷좌석에 앉아보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는 자유가 몰려왔다. 잠시 눈도 감아보는 한가로움도 누리고, 무엇보다 자연인으로서의 감각이 살아났다. 고개를 돌려 전방위를 볼 수 있다는 작은 여유 하나가 내 온 몸의 말초신경을 두리번거림의 호기심과 탄성에 집중하게 했다. 기계의 속도가 주는 편리함 때문에 그동안 참 많은 것을 잃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길가에 잠시 차를 멈추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나와 길동무하는 구름에 친근한 눈길 한 번 줄수도 있었을텐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왜 그리도 엑설레이터만 여태까지 밟고 있었는지 후회가 된다.

 

차 뒷좌석은 시야의 제약이 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가 시야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 운전석보다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음은 창이 넓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넓기 때문이다. 본다는 건, 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유를 통해서이다. 두리번거릴 수 있는 여유가 섬세한 시각을 갖게 한다. 시선을 빼앗은 그곳을 오래 볼 수 있는 여유가 나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아오모리의 대지가 아름다운 이유... 도시의 아스팔트라면 벌써 녹아 없어졌을 적은 눈. 그 적은 눈을 아오모리의 대지는 여전히 그대로 풍성하게 품고 있었다. 아! 그렇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작은 것조차 소홀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지는 적은 눈을 품어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따뜻한 흙은 적은 눈을 소중히 다루어 도시보다 오래 눈의 눈부심을 선사한다. 가난해도 살 수 있는 곳이 자연이다. 소박함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곳이 자연이다. "너 같은 존재도 이곳에서는 충분히 살 수 다"고 아오모리의 대지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아오모리에서는 적게 가지고 있어도 된다. 적은 눈도 깔보지 않고, 녹이지 않는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고들 말한다. 권력이 높으면 하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있다고들 생각한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존 능력과 정비례한다. 풍성함에 양성 반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잔인한 도시의 아스팔트도 폭설에는 백기를 들고 잠시나마 눈의 다스림을 인정한다. 하지만 적은 눈에는 참으로 잔인하다. 겨우 살아서 내려온 눈송이는 아스팔트에 닿자마자 검은 물이 되고, 그나마 살아남은 눈송이는 자동차 타이어에 무참히 짓밟혀 질척이는 물이 된다. 적은 것이 생존할 수 없을 때 자연성을 잃은 것이다. 적은 것이 아름다움을 연출하지 못할 때 사람은 지저분해진다.

 

 

인간성이 회복된다는 건 작은 것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된다. 작은 꽃의 미세한 향기, 작은 실개천의 졸졸거림에 감탄할 때 영혼은 대지처럼 여유로워진다. 여행길에서 이름 모를 꽃에 이름을 지어주는 감성이 내 속에서 회복됨을 본다. 이웃집 아낙네의 잔소리가 들리고, 구수한 된장 냄새에 끌려 발걸음을 재촉할 때 사람은 태초에 아담이 누렸던 한가로운 산책길에 접어들게 된다. 산책하는 아담에게는 이름모를 꽃이 없었다. 아담의 눈에 보이고, 아담의 느낌이 그 꽃의 이름이 되었고, 그 실개천의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작은 꽃을 볼 수 있고, 그 이름 모를 작은 꽃에 작은 감탄으로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비로서 인간이 되는거다. 저기 멀리서 고개 떨구고 걸어가는 사람을 향해 "어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아"라고 불러줄 때 아오모리의 대지는 도시를 다스린다.

 

The John Dunbar Theme / John B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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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