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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모신 아들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 때문에 설레고, 기쁘고, 한 없이 즐겁기만 합니다.  돌아서면 어머니 생각에 미안합니다. 곁에서 땀도 닦아드리고, 말벗도 되어 드려야 하는데, 그녀 만나는 행복에 병수발이 줄어듭니다. 모두에게 "나 사랑에 빠졌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철 없는 짓을 하냐"는 주위의 핀잔을 들을까 혼자만 끙끙합니다. 어느덧 아들은 두 가면을 쓰고 하루를 삽니다. 집 앞에 이르면 실 없는 웃음 대신 그윽한 수심을 띄며 엄마를 대합니다.

 

2. 아들은 용기내어 엄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니의 신음 앞에서 그녀의 웃음이 들려요”
“얘야. 행복한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렴. 엄마는 내 아들이 나 때문에 연애도 못할까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들은 신음하는 엄마에게 그녀와의 웃음을 이야기 합니다. 신음 섞인 엄마의 웃음이 약하게 들립니다. "엄마 요즘 어떠세요?"라는 말 대신에 "아들아 오늘은 어땠냐?"는 엄마의 궁금함이 오랜 말벗이 되어 줍니다. 
 
3. 사랑은 행복에 공감합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아프다. 너도 아파라”는 사랑이 아닙니다. 무심함에 속상하기는 하지만 그의 철 없음에 안심이 됩니다. "나 없어도 잘 살겠구나" 하는 생각에 부질없는 노파심을 내려놓습니다. 사랑은 행복을 축복합니다. 
 
4. “아프다. 너도 아파라”
내 행복에 겨워 주위의 아픔을 못보는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내 아픔에 겨워 주위의 행복을 못 견뎌하는 것도 이기주의입니다. 내가 행복하면 너그럽고, 내가 불행하면 밴댕이 소갈딱지가 되는 이기주의.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파야 한다는 극단 이기는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자발적 공감을 사그라들게 합니다. 
 
5. “아프냐? 나는 더 아프다”
더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 못마땅합니다. 그 정도 아픔은 사치이며 행복에 겨운 소리라 일축합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안다하지만 사실 자기의 아픔만큼 도달해야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짜장면 사 먹고 싶은데 돈 천 원이 모잘라 못 먹었다. 그 때 너무 서글펐다"는 말에 걸인은 공감하지 못합니다. “야 똥인지 된장인도 모르는 놈아. 그게 고난이야. 어디서 끙끙 앓는 소리야” 허나 그런 경험이 없는 나는 그를 안고 기도합니다. 공감은 행복할 때 더 크게 반향합니다. 행복은 작은 고난에 크게 공감하는 힘이 됩니다. 
 
6. 행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는 실상 지독한 이기주의인지 모릅니다. 해맑은 아이의 웃음 같은 모두의 삶에 눈살이 찌푸려 진다면 자기애에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조심하는 아들과 너의 행복을 들려줘라는 엄마가 있는 세상이야 말로 우리가 바라는 나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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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랭크 안